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요동정벌 (문단 편집) === [[오녀산성]] 공격 === >{{{#!wiki style="margin:24px 0 0 16px;float:right;width:40%;max-width:500px;font-size:.9em;" [[파일:external/www.palhae.org/data_pds_000021_20080908164521_1.jpg|width=100%]][br]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우라산성).}}} >[[이성계|우리 태조]]가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 함흥에서 장진으로 가는 교통로이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을 넘어 6백여 리를 진군해 설한령(雪寒嶺)[* 평안북도 강계군 용림면과 함경남도 장진군 서한면 사이에 있는 고개]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7백여 리를 행군해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저녁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 찼는데 그 빛줄기가 모두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서운관(書雲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기상 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에서 그것을 두고 맹장(猛將)의 기운이라고 보고하자 왕이, "내가 이성계를 보내니 하늘에서 응답한 것이 틀림없다."라고 기뻐했다. 당시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이동해 들어간 다음 험한 지세에 의지해 저항하려 했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당도하자 이오로테무르가 와서 응전해 보다가 잠시 후 무장을 해제하고 큰 절을 올리며, "제 선조도 본디 고려인이니 저도 고려의 신하가 되겠습니다."고 하면서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이오로테무르는 뒤에 이원경(李原景)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한 채 계속 저항해오므로 아군은 성을 포위했다. '''마침 태조가 활이 없는지라 종자의 활로 [[애기살|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면상을 명중시켰다.''' 이에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기세가 꺾여버렸으며 고안위는 처자를 내버려둔 채 밤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도주해 버렸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성을 나와 투항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여러 성들도 모두 투항해 오니 1만을 넘는 민호가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노획한 소 2천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자 수많은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물결같이 귀순해 왔다. 이에 따라 동쪽으로 황성(皇城), 북쪽으로 동녕부, 서쪽으로 바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적이 일소되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공민왕 19년 봄 정월}}} {{{#!wiki style="margin:24px 0 0 16px;float:right;width:40%;max-width:500px;font-size:.9em;" [[파일:attachment/choonobow123.jpg|width=100%]][br] KBS 드라마 [[추노(드라마)|추노]]에서 등장한 [[애기살|편전]]. }}} 이때 동원된 병력은 총 15,000명이었는데 서북과 동북의 병사는 각각 보병 9,000명, 기병 600기 / 보병 4,700명, 기병 200기에 불과했고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가별초|이성계의 친위 병력]]은 1,6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 동원된 병력은 중앙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 → 함흥 → 강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오녀산성[* 우라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우라는 [[만주어]]로 강을 뜻한다. [[아무르 강]]의 만주어 이름이 바로 사하리얀 우라.]을 쳤다. 훗날 [[용비어천가]]에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할 때 활약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을 공략할 때 이성계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이성계는 난전 속에서 본인 활도 아니고 종의 활을 빌려서 [[편전]]을 쐈는데 70발 모두를 적의 머리에 구멍을 내버렸다. 이러한 초인적인 포스를 풍긴 이성계의 활약으로 성을 함락시키고 10,000호가 넘는 사람들이 투항했고 그 결과 고려 정벌군은 파사부와 우리산성이라는 두 개의 주요 길목 점령에 성공하며 요동성 정벌에 한발 더 다가섰다.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